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가난한 – 프토코스 (가난한, 빈곤한, 구걸하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프토코스는 프톳소(두려워하여 '움츠려들다, 쭈그리다, 웅크리다')에서 유래
(a) 본래 '쭈그리고 움츠려드는 사람의'란 의미였다. 자주 비참한 가운데 헤멘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b) 이 단어는 '거지 신세로 전락한, 구걸하는, 자선을 구하는, 거지처럼 가난한, 가난한, 천한'이란
의미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형용사는 거지(beggar)를 뜻하는 명사로 더 많이 사용된다.
프토코스는 거지가 될 만큼 가난하여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자신의 재산으로 살 수가 없어 손수 일하여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페네스)와는 다름.
(c) 이 단어는 일반 세속 헬라어에서 '빈약한, 적합하지 않은, 부족한, 무력한, 무엇을 양보하는'이라는 비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70인 역본의 용법.
형용사 프토코스는 70인역본에서 다섯 개의 히브리어 역어로 약 100회 나온다.
(a) 아니(억압 받는, 가난한, 비천한, 낮은; 예: 레 19:10; 삼하 22:28; 욥 29:12; 시 10:9; 시 12:5; 사 3:14 이하)는 37회 사용된다. 이 단어는 억압 받는 가난한 자와 관련되어 있다.
(b) 달(낮은, 연약한, 가난한, 얇은)은 22회 사용되며, 특히 암2:7; 암 4:1; 암 5:11; 암 8:4; 암 8:6와 시 72:13; 시 82:3; 시 113:1과 잠 19:4; 잠 19:17; 잠 28:3; 잠 28:8; 잠 28:15에 나온다. 달은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후기로 오면서 사회 계급의 가장 낮은 지위, 즉 가난하고 궁핍하며 하찮은 소작농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c) 라쉬(결핍한, 가난한)는 11회 사용된다. 이 단어는 순수하게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궁한, 결핍한'을 뜻한다. 이 단어는 지혜 문학에서 선호하는 말이다. 잠언에서는 특별히 부유함과 대조되는 말로 사용되었다(예: 잠 13:8; 잠 14:20; 잠 17:5; 잠 19:7; 잠 19:22; 잠 22:2; 잠 22:7; 잠 28:6; 잠 28:27).
(d) 에브욘(결핍한, 궁한, 가난한)은 11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프토코스의 관례적인 의미에 가장 가까운 단어로서, 의연금을 구하고자 애쓰는 사람, 거지를 의미한다. 그 다음에는 일반적으로 매우 가난하고 집이 없는 자에 대한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영적 빈곤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나 웨 에브욘(가난과 궁핍)이라는 연결구는 기도하는 자의 태도를 암시하는 말이다 (7회, 시 35:10; 시 86:1).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며,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탄원하러 나오는 자이다.
프토코스로 번역된 히브리어들을 살펴보면, 70인역본에서 나오는 프토코스가 그 단어의 의미를, 특히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인 면으로 확대시켰음을 확인케 된다. 특히 프토코스는 70인역본에서 에브욘의 의미를 따라서 주로
① 단순히 물질적 의미에서 '가난한 자',
②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억압을 당하는 사람,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③ 하나님 앞에 영적 상태로서 영적 빈곤이나 고통 중에서 오직 하나님만 확신하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34회)
(1) 복음서의 프토코스(문자적 의미로 사용)
① 막 10:21에서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 부자에게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셨다(병행구 눅 18:22). 병행구 마 19:21에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는 조건을 붙여 언급하신다.
② 막 12:41 이하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적은 연보가 부자의 많은 연보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이 과부는 그가 가진 전부 또는 마지막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삶의 보장을 믿음으로 기대한다.
③ 막 14:7에서 예수님은 수난으로 다가가는 사건 중에서만 구제가 부차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막 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병행구 마 26:11; 요 12:8).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동안은 축제 기간이다(참조: 막 2:18-20). 이 때가 이제 마지막에 달했을 때 행한 여자의 행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더하여 그녀의 행위는 일종의 예언자적 표징 행위의 성격을 갖는다. 예수님의 죽임을 당해서 무덤에 장사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 죽은 사람에게 행하는 마지막 의식을 행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으로는 이것을 받으실 수 없다(참조: 막 16:1-6). 이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으로서 이 의식을 미리 행한다. 그런데 이 때에는 죽기로 예정된 자에게 사랑에서 나오는 엄청난 행위를 베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 문제였다
(2) 예수님은 축복의 말씀에서 가난한 자에 대해 말씀하셨다.
① 예수님은 첫번째 축복의 말씀에서 가난한 자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눅 6:20)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누가복음의 말씀은 언뜻 보면 외적 지상적 빈곤 상태에 대한 찬사와 축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물질적 가난이 미덕이고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첨하고 부자들을 통렬히 매도하는 세속적 민중 선동자가 아니다.
외적인 가난이 만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복이다.
그러나 종종 나타나는 듯이 가난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든다면 그 가난은 복이 아니다.
그리고 가난이 그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그것도 복이 아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외적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자연인들에 대해 말할 때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 천국에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가난에 아무런 미덕이나 유익이 없다. 빈궁이 영성(靈性)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가난"은 외적 가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6장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 주님은 "가난"이란 말을 세속심에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며 따라서 부귀에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부귀에 의존하는 정신은 정죄받은 정신이다. 많은 부자들이 세속심에 사로잡혀 세상의 부귀를 탐내고 의지하는 것과 같이 많은 가난한 자들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단지 외적으로 가난한 자라 하여 "복되도다"라고 할 수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심지가 약하거나 소심한 자, 다른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무능무지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식하는 심령 곧 일부러 겸손하는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심령이 가난한 것, 이 영적 가난은 자신의 결핍, 연약, 공허,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 죄악 등을
분명히 알아서 자신을 겸손하게, 정당하게 평가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② 마 11:5(병행구 눅 7:22),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여기서
예수님은 사 61:1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신다.
주님의 행위는 가난한 자에게 즉 구원을 갈망하는 자에게 대한 복음의 선포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